3월 22일은 일요일이었다.
아들과 극장에 가는 일은 요즘 흔치 않다. 올해 아이에게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, 아이도 우리도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했다. 그래도 그날은 셋이 나섰다. 잠시 쉴 겸이었다. 와이프와 아들과 나, 그렇게 영화를 보러 갔다.
「프로젝트 헤일메리」였다.
영화는 주인공이 우주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. 기억이 없다. 제 이름도 모른다. 곁에는 동료 둘이 죽어 있고, 배에는 그 혼자다.
그가 눈을 뜨자 의료용 로봇이 묻는다.
“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?”
그는 무의식적으로 답한다. “4.”
별것 아닌 대사였다. 그런데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.
그 한 주를 나는 막막함으로 보내고 있었다. 앞으로 어떻게 하지. 내가 해낼 수 있을까. 그 생각만 머릿속을 돌았다. 그런데 2 더하기 2는 4라는 그 당연한 문답이, 이상하게 나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.
2 더하기 2가 4인 것처럼,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안다. 그건 정해져 있다. 거대한 미래를 당장 걱정하는 대신,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하고 단순한 일부터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. 그 장면은 나에게 그런 신호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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열흘쯤 전, 회사를 나왔다. 그 이야기는 지난번에 적었다. 통보는 금요일이었고, 그래서 월요일 오전 열 시가 비었다. 매주 그 시간에 하던 본부장 회의가, 그 주부터 없었다.
통보를 받고도 한동안 대무자 걱정을 했다. 내가 보던 일들은 누가 맡나. 인수인계는 되나.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었다. 그런데 그때는 그게 먼저 떠올랐다. 그 자리에 그만큼 진심이었던 모양이다.
이 회사로 옮길 때 마음먹은 게 있었다. 임원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. 정규직으로 돌아가고 싶었고, 그러려면 전무급이나 부사장급으로 한 번만 더, 짧게 임원을 하면 되겠다고 봤다. 지나고 보니 그 판단이 나쁘지 않았다. 생각한 대로 했다. 다만 그 뒤가 또 다른 고민을 안겼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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헤일메리는 미식축구에서 온 말이다. 경기가 끝나가는데 점수가 모자랄 때, 되든 안 되든 엔드존을 향해 길게 던지는 마지막 패스. 성공할 확률은 낮다. 그래도 던진다. 던지지 않으면 끝이니까.
그 한 주, 나도 몇 개를 던졌다.
가장 먼저 던진 건 앱이었다. TrainsOut. 별생각 없이 만들어 올렸다. 되든 말든이었다.
십수 년 전에도 비슷한 걸 해본 적이 있다. 남이 만든 게임의 껍데기만 바꿔 파는 리스킨이라는 게 있었고, 그걸 열 몇 종 굴려 한 달에 백 달러쯤을 벌었다. 그래서 안다. 돈을 들여 알리지 않으면 수익은 거의 나지 않는다.
만드는 건 자신이 있었다. 수익은 자신이 없었다. 정확히는, 알리는 일 자체는 할 수 있었지만 리스킨이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은 끝내 들지 않았다. 그래서 그냥 던졌다. 던지는 것 자체가 필요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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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다음에 던진 것들은 조금 달랐다.
혼자 만들지만, 떠오르는 대로 만들지는 않았다. 기획이 있고, 설계가 있고, 데이터가 있고, 품질을 보는 눈이 있다. 회사에서라면 역할마다 맞는 사람을 배치하는 일까지가 설계였다. 혼자라고 그 단계를 건너뛰면 결국 어딘가에서 무너진다. 그걸 너무 많이 봐왔다.
그래서 Claude를 나눠 쓰기 시작했다. 어떤 창에서는 기획자였고, 어떤 창에서는 설계자였다. 기획 창을 열 때는 짧게 역할을 정해줬다. “너는 스티브 잡스야.” 그렇게 적어두고 시작했다.
사라진 그 회의를, 나는 소프트웨어 안에 다시 세우고 있었던 셈이다.
다만 페르소나를 입힌다고 결과가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. 도움이 된 건 따로 있었다. 결과물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비판하는 역할. 그게 있을 때 실수가 그나마 줄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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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화에서 주인공은 혼자가 아니다. 다른 별에서 온 생명체를 만난다. 로키라고 불렀다. 말도 몸도, 숨 쉬는 공기마저 다른데 둘은 결국 함께 일한다. 말이 채 통하기도 전에 둘은 서로를 믿는다.
내 쪽은 순서가 반대였다.
언젠가 Claude가 확신에 차서 내놓은 게 문제가 된 적이 있다.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. “확인 안 했지만, 그런 줄 알았습니다. 죄송합니다.” 사람이 했을 법한 말이라 잠깐 멈칫했다. 비판하는 역할을 굳이 따로 둔 건 그런 일들 때문이었다. 거짓을 못 하게 묶어두니 말투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다. 그 반응은 모델마다 또 달랐다.
신뢰가 먼저였던 로키와 달리, 나는 신뢰를 만들어 넣어야 했다.
그런데 가끔, 역할을 달리하여 창을 열다 보면 그 역할을 해주었던 구성원들이 떠올랐다.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던 사람들. 기획자, 설계자…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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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화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. 두 세계의 운명을 건 단 하나의 미션. 주인공에게 두 세계는 지구와, 로키의 별이었다.
나에게도 두 세계가 있다. 가족의 안정과, 나의 일. 오래 그 둘 사이에서 걸어왔다.
처음 그 둘이 부딪힌 건 스물 몇 살 때였다. 졸업 무렵 특채로 큰 회사 연구소에 붙었는데, 간 기능에 문제가 생겨 반년을 검사받아야 했다. 결국 내가 그 자리를 내려놓았다. 지방에서 막 올라와 대치동 고시원에 살던 때였다. 반년을 일자리 없이 버텼다. 미래가 두려웠고, 불확실했다.
그 반년이 나를 만들었다. 그 뒤로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.
요즘 이력서를 다시 쓰느라 내 경력을 들여다본다. 직장을 열다섯 번 옮겼다. 한곳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에 비하면 잦은 편이다. 그중 열 번쯤은 석 달을 못 채운 자리였다. 들어간 회사가 문을 닫기도 했다. 짧게 끝나고 다시 시작하기를 거듭했다. 그런데도 돌이켜보면, 나는 꽤 단단히 버텨온 편이다.
헤일메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. 나는 그 긴 패스를 여러 번 던지며 여기까지 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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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화 끝에서 주인공은 지구로 돌아오지 않는다. 다른 별에 남아 그곳 아이들을 가르치며 산다. 돌아가는 대신 새집을 얻은 셈이다.
나는 아직 어느 쪽도 정하지 못했다.
짧은 사이에 많은 일이 오갔다. 몇 건의 임원 제안이 있었고, 어떤 건 내가 내려놓았다. 지금도 한두 자리가 진행 중이고, 결과는 또 한두 주 뒤에 나온다. 오랜 동료들과 자주 만나 차를 마시고, 그 사이에 일감을 찾는다. 그들이 소개해준 헤드헌터 몇과도 이야기를 잇고 있다.
돌아갈 수 있다면, 지금의 나에게 맞는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. 그러면서도 새로운 별들을 함께 들여다본다. 프리랜서, 혼자 하는 창업, 컨설팅, 가르치는 일. 엉뚱하게는 지금이라도 중장비 운전 같은 걸 배워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. 그것도 꽤 재밌을 것 같다.
전과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말을 섞고 있다. 그게 싫지 않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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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기까지가 3월의 어느 일요일 이야기다. 이 글을 정리하는 지금은 5월의 끝이다.
그사이 매일 조금씩 만지는 게 하나 생겼다. 벌써 한 달째다.
InsightRadar라고 이름을 붙였다. 대단한 건 아니다. 내가 팔려는 게 무엇인지 한쪽에 적어두고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, 쓸 만한 이야기가 그 옆에 차곡차곡 쌓인다. 다 둘러본 뒤에는 정리된 메모 한 장으로 뽑아낼 수 있다.
미국 시장을 들여다보려고 매일 Reddit과 게시판을 뒤지다가, 그 일을 거들어줄 도구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만들기 시작했다. 30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금씩 고쳤다. 거창한 계획이 있어서는 아니다. 그저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, 오늘 하나 한 것뿐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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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이가 6월 1일부터 수련회를 간다. 그 며칠, 와이프와 둘이 부산에 가기로 했다. 와이프의 고향이고, 나에게는 제2의 고향이다.
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. 순식간이었다. 우리 둘만의 여정을 짠 게 얼마 만인지.
대단한 계획은 없다. 좋은 호텔에서 자고, 맛있는 걸 먹고, 광안대교를 달려보기로 했다. 그게 다다.
헤일메리는 절박한 한 방이다. 그래도 던지는 사이사이, 숨은 쉬어야 한다. 바다를 보며 가슴을 펴고, 크게 한 번. 그러고 돌아오려고 한다.